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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 증류주의 한 종류로 알코올 도수는 대개 40도 이상이며 주로 칵테일을 제조하는 데 많이 사용됩니다

 영국 명예혁명 이후, 진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영국 국민의 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출신의 윌리엄 3세가 영국 왕위에 오르자, 네덜란드에서 유행하던제네바라는 술이 영국에 소개됩니다.

윌리엄 3세는 프랑스 와인과 브랜디 대신 자국산 증류주를 장려했고, 이로 인해 네덜란드식 제네바가 영국에서(Gin)’으로 재탄생하며 큰 인기를 얻게 되었죠. 특히 진은 값이 싸고 쉽게 생산할 수 있어 대중들에게 폭발적으로 퍼져나갔고, 이는진 열병(Gin Craze)’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거리 곳곳에는 진을 파는 가게들이 생겨났고, 영국 국민의 술로 자리 잡았습니다.

진이 싸구려가 된 데에는 주세법도 한몫했는데, 주류 판매를 시작하기 15일 이전에만 간판신고를 하면 누구나 주류를 제조하거나 판매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니 가내수공업으로 마구 만들어낸, 굉장히 의심스러운 싸구려 진이 영국 내에 널리 퍼진 것이다. 오죽하면 “1페니면 제대로 마실 수 있고 2펜스면 죽고도 남을 만큼 마실 수 있으니 어디 한 번 제대로 취해 보자"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Drunk for 1 penny, dead drunk for tuppence, straw for 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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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Symposium)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사교적이고 철학적인 모임으로, 그리스어심포시온(συμπόσιον)’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함께 마신다는 뜻으로, 친구들이 함께 술을 마시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하는 모임을 의미했죠.

고대 그리스에서 심포지엄은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라, 철학, 정치, 예술에 대한 토론과 논쟁의 장이었습니다. 이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와인을 마시며 다양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나누었고, 문학과 시 낭송, 음악 공연도 종종 곁들여졌습니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도 심포지엄에 참여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제자들과 열띤 논의를 펼쳤습니다.

플라톤의 저서 심포시온은 이러한 모임을 배경으로 하며, 사랑의 본질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 심포지엄이라는 단어가 학술적 모임이나 토론을 의미하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심포시온에 언급된 에로스에 대한 내용을 인용합니다. 온전한 인간을 반으로 갈라 둘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다른 반쪽을 끊임없이 찾게 되는 것이다. 원초적 상태에서 인간은 완전하고 온전한 존재였기에, 그 온전함을 추구하려는 욕망, 완전해지려는 욕망을 우리는에로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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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고대 문명에서 치료와 건강 유지 수단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에서는 와인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약으로 여겨졌습니다. 와인에는 천연 항산화 물질이 있어, 상처를 소독하거나 감염을 막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죠.

히포크라테스는 와인을 소화 촉진과 통증 완화에 활용했고, 로마 병사들도 전투 후 피로를 풀고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물이 오염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던 당시에는 와인을 섞어 마시면 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적포도주에는 폴리페놀이 함유되어 항산화작용에 따른 심혈관계 건강개선, 레스베라트롤은 혈당을 조절하고 인슐린 민강성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퇴행성 뇌질환의 위험을 낮추는데 도움을 준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효과는 적정량의 와인을 섭취할 때만 기대할 수 있으며, 과도한 음주는 건강에 해로울수 있어 하루 한잔을 넘지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고가 와인은 특별한 포도 품종과 최적의 기후, 토양을 갖춘테루아(Terroir)’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보르도나 부르고뉴 지역,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와 같은 유명 와인 산지의 포도는 그 지역 특유의 기후와 토양이 반영된 독특한 풍미를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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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분단은 19세기 유럽 열강의 식민지 경쟁으로 인한 인위적 경계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884, 유럽 열강들은 독일 베를린에 모여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하는 '베를린 회의'를 열었습니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은 아프리카에 거대한 경제적 잠재력을 인식했고, 자원과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민족, 언어, 문화는 고려하지 않고 지도를 나누듯 직선 경계를 그어 각자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 등은 각자의 이익을 위해 대륙 전역을 나눴고, 이렇게 그어진 경계선은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이 되었습니다.

이 인위적 분단은 이후 많은 분쟁과 내전을 야기하며, 아프리카 각국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성을 초래했습니다. 외세의 탐욕으로 생긴 경계선이 지금도 아프리카의 상처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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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하면 종교나 문화보다 테러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번째,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이슬람을문명화되지 않은, 폭력적 종교로 묘사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그렸고, 그 편견이 현대까지 영향을 미쳤죠.

두번쨰, 1979년 이란 혁명은 서구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서방과 대립하는 종교적 국가의 등장으로 인해이슬람은 반서구라는 이미지가 강화됐죠. 언론은 이를 자극적으로 보도했고, 이슬람에 대한 공포와 불신이 점점 커져갔습니다.

세번째, 2001 9 11, 미국에서 발생한 테러는 세계적 충격이었고, 그 배후에 있는 알카에다는 스스로를 이슬람 단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언론은이슬람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면서 이슬람 전체가 테러와 연관된 듯한 이미지를 만들었어요. 사실, 테러리스트들은 특정 이슬람 극단주의자일 뿐, 전체 이슬람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렇듯 많은 이슬람 교도들은 평화와 상호 존중을 중요시하는데도, 영화, 뉴스 등 미디어에서는 이슬람이 폭력적이라는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테러와 관련된 공포의 이미지는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행동임을 인식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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