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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는 어릴 적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그리고 연속된 사랑의 실패로 당대 풍경화를 위시한 자연주의의 경향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표현주의 양식을 주로 채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반적으로 우울하거나 신경증적인, 불안의 느낌이 나는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1893, 뭉크는절규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 고통을 충격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불안과 두려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눈안의 눈
키스

 

‘절규’는 특유의 왜곡된 인물과 소용돌이치는 하늘을 통해 불안과 공포를 극대화합니다. 뭉크는 이 그림이자연이 절규하는 소리를 들은 자신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라 밝혔습니다. 그가 겪은 심리적 혼란과 불안은 당시 사회적 불안정과도 맞물려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절규

뭉크가 남길 글을 인용합니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 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가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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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의 이름으로 적의 밀정을 척살한다. 지옥에서 보자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황옥 경부 폭탄사건을 배경으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일본 경찰 사이의 긴장된 첩보전을 그렸습니다.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은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특명으로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에게 접근하고, 한 시대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정체와 의도를 알면서도 속내를 감춘 채 가까워집니다. 독립운동의 대의를 두고 갈등하는 이정출의 내적 고뇌와,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 서로를 속이고 속이는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압권입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가 쌍방간에 새어나가고 누가 밀정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의열단은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할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오기 위해, 그리고 일본제국 경찰은 그들을 쫓아 모두 상해에 모입니다.

의열단 은거지에서 정채산이 이정출과 김우진과 술잔을 기울이며 한 대사를 인용합니다. 난 사람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내가 한 말조차 믿지 못하겠소. 다만, 내가 해야만 할 일을, 사람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믿을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 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이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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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산업의 선두주자였던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의 혁명을 예견하고도 이를 놓치면서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888년 설립된 코닥은 20세기 내내 필름 카메라 시장을 지배한 선두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 기술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1975, 코닥이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했지만, 필름 시장에 대한 의존으로 이 기술을 상업화하는 데 소극적이었습니다. 코닥은 디지털 혁명을 무시했고, 경쟁사들이 빠르게 디지털 카메라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코닥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고, 2012년 파산을 선언했습니다.

1981년에 내부 보고를 통해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 시장을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상용화를 사양했고, 그 결과 동년에 일본의 소니가 마비카 계열을 공개하며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상용화시킵니다. 이렇게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를 발명하고도 상용화하지 않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며 시대의 변화를 과소평가하다가 실패한 사례로도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쓰라린 대가와 시대의 흐름에 보수적인 색채의 오명을 쓴 코닥은 결국 이를 후회하게 되었고 뒤늦게나마 디지털 시장을 인정하며 스마트폰 시장에 후발 주자로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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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4 29, 의거 당일, 김구 선생과 마지막 아침식사를 한 윤봉길은 떠나면서 자신의 시계를 풀어 김구선생과 바꾸자고 합니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니 저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한 시간밖에 쓸수 없으니까요

스물네살의 나이였던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축하 행사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고위 인사들을 처단했습니다. 이 의거로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주요 인물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용감한 행동은 세계에 한국 독립운동의 존재를 알렸고, 장제스 중국 총통이 "조선 청년이 해낸 일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이라고 극찬할 만큼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정부는 한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었고,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영웅으로 남았습니다.

 

윤 의사는 거사 이틀 전,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인

용합니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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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이후, 강력한 규율과 법 집행을 기반으로 급격한 발전을 이뤄낸 도시국가입니다. 초대 총리 리콴유는 사회 안정과 경제 성장을 위해 범죄와 비위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도입했습니다.

거리에서 침을 뱉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는 큰 벌금형을 받았고, 마약 밀매 등 중범죄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규율 덕분에 싱가포르는 아시아에서 가장 청결하고 안전한 국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특히, 강력한 법 집행은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는 벌금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도시 정화 캠페인과 질서 유지가 엄격합니다. 리콴유가 중국인이 갖고 있는 나쁜 습관들을 모두 버리겠다며 온갖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죄다 벌금 물도록 강력하게 규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념품 가게마다 '벌금의 도시, 싱가포르'라고 프린트된 티셔츠를 판매하는 것도 눈길을 끕니다. Fine City, Singapore를 말하는 건데 이 Fine에 벌금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싱가포르 관광청의 홍보 구호로 쾌적한 도시라는 뜻인데 중의적으로 이렇게도 비꼬며 풍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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