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가톨릭 교회의 고해성사는 신자들이 죄를 고백하고 성직자로부터 용서를 받는 의식입니다. 이 과정에서 신자들은 가장 은밀하고 내밀한 죄를 털어놓게 되죠. 성직자는 이런 고백을 듣고 신앙적 조언을 주었지만, 때로는 그 내용을 통해 권력이나 통제력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고해성사의 절차는, 먼저 참회자의 죄에 대한 자세한 성찰과, 통회(절실한 회개)가 있어야 하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하고(정개), 마침내 사제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뒤이어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을 받고 고해신부의 사죄경을 듣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고해는 신자들의 내면과 비밀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이 때문에 성직자들은 개인의 가장 숨겨진 욕망과 죄를 들으며, 신자들의 삶에 깊이 개입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슴에 남아있던 고백하고 싶었던 죄가 있나요? 제가 사제를 대신하여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기도문인 사죄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용서하기 바라며,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나도 그분의 권한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사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시선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이 말은 권력과 통제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끌어들이는 자가 권력을 쥐었죠. 고대 로마에서는 검투사 경기와 같은 대형 이벤트를 통해 군중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이를 통해 정치적 안정과 지배력을 유지했습니다.

현대에는 미디어와 기술이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TV, 인터넷, 그리고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장악하는 도구가 되었고, 이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이들이 등장했죠.

철학자 미쉘 푸코의 작품, 감시와 처벌 중 루이 14세의 암살 미수범에 대한 고문장면이 충격적입니다. 파리 시내에서 진행된 고문은 너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빠른 처형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이런 고문 행위를 통해 시민들에게 왕권을 과시하고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식을 시각화하는 것이지요

팝옵티콘이라는 감옥은 24시간 불이켜져 있고, 감시하는 망루는 어둡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밝은 곳을 감시하는 일, 보이지 않지만 교도관의 시선이 담당하는 역할이 권력의 본질인 것입니다.

반응형
반응형

중세에 쓰인 거대한 책, 사탄의 성경 코덱스 기가스는 가장 방대한 중세 필사본 중 하나로 거대한 악마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악마의 성서라고도 불립니다.

코덱스 기가스는 13세기경 체코의 한 수도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거대한 필사본으로 내용은 중세 각종 지식이 담긴 백과사전 성격입니다. 이 책의 무게는 약 75키로에 달하며, 길이만도 거의 1미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유명해진 이유는 중간에 있는 '악마의 초상화' 때문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수도사는 수도원 규율을 어기고 독방에 갇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책을 하룻밤 만에 완성하여 수도원의 영광을 높이려 했으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악마의 그림을 책에 넣었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이 초상화는 사람보다 훨씬 큰 악마가 그려져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놀라운점은 글씨체가 전부 동일한 것을 보면 혼자서 집필한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필체의 변화없이 마치 기계로 찍어낸것처럼 일정하며 오자 역시 단 한군데도 찾아볼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320장 중 8장이 사라졌는데 악마로부터 전해들은 인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1077,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고, 교황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카노사의 성을 찾았습니다. 추운 겨울, 하인리히는 무려 3일 동안 맨발로 성문 앞에서 기다리며 회개했습니다. 결국 교황은 그를 용서했고, 이 사건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세 유럽에서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간의 갈등을 상징하며, 교황권이 황제권을 능가할 수 있음을 보여준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인리히 4세는 굴욕을 맛보았으나 독일에서의 권력 장악에 성공한 후 1084년 로마를 탈환하여 교황을 폐위하며 복수를 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에 대항해 이른바문화투쟁을 벌일 때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라고 연설했는데 이 말은 바로 이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빗대어 우리는 로마 교황청 등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의 길을 가겠다는 천명이었습니다.

황제가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 카노사의 굴욕이었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평생의 라이벌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사람 모두 확고부동한 중화주의자로서 권력 의지를 신봉하고 군사력을 권력 쟁취의 수단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장제스는 국민당을 이끌며 중국을 통일하려 했지만, 결국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배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 군사력의 차이가 아니었죠.

첫째, 대중의 지지를 잃은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장제스는 부패한 정부와 지주 중심의 경제 정책을 유지했지만, 마오쩌둥은 농민과 노동자들을 대변하며 토지 개혁을 약속했습니다. 이는 다수의 중국인들에게 공산당의 혁명을 지지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둘째, 국민당의 군사 전략 실패입니다.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쟁과 내부 반란을 동시에 처리해야 했고,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습니다. 반면, 마오쩌둥의 홍군은 유격전과 대중 선동을 통해 점차 힘을 키워나갔습니다.

셋째, 미국과 소련의 외교적 영향입니다.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나, 내부 부패와 전략적 실수로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마오쩌둥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대중 지지, 군사 전략, 외교적 지원에서 마오쩌둥이 장제스를 압도하며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