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요약]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소설가이자 전기 작가, 극작가입니다. <마리 아앙투아네트>, <에라스무스>, <마젤란> 등의 전기를 썼고, <낯선 여인의 편지>, <감정의 혼란> 등과 같은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색하는 중단편 소설 등을 남겼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깊이 있는 통찰력과 아름다운 문체로 세계 문학사에 큰 영향을 남긴 작가입니다.
1938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1940년에는 미국으로, 1942년에는 브라질로 건너갔습니다. 1942년 2월 리우데자네이루 인근 페트로폴리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는 그가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남긴 기록으로,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끈질기게 인간에 대한 희망을 붙들고 있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미공개 에세이를 발견하고 엮은 독일 편집자 폴커 미헬스와 츠바이크 연구자 클라우스 그레브너는 이 아홉 편의 글을 두고 슈테판 츠바이크 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추억과 격려의 글들”이라고 평합니다.
[출처]
도서;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XYXTct0Ix4M
슈테판 츠바이크가 남긴 미공개 에세이 9개 기록 중 제게 생각의 울림을 주었던 2편 가운데 고등학교 시절 깨달음의 이야기인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 편을 읽여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이야기,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
《리더스 다이제스트》, 뉴욕, 1941년 7월 영문으로 첫 수록. 우르술라 미헬스벤츠Ursula Michels-Wenz 독일어 번역
빈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학교에서 가장 촉망받는 친구가 있었다. 열여섯 살이었던 그는 아주 잘생기고 재능이 뛰어나고 성실하며 품행이 단정하고 야망도 있었다. 우리는 그가 똑똑한 머리로 분명 고위 공직자가 되어 빛나는 경력을 쌓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외교관 메테르니히 후작의 이름을 따 그를 ‘메테르니히’라고 불렀다.
메테르니히에게는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단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고상함이었다. 그는 항상 갓 다린 말끔한 정장에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매고 학교에 왔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운전기사가 딸린 리무진을 타고 등교했다. 그럼에도 그는 거만함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다정한 친구였고, 우리는 모두 그를 좋아했다.
어느 날 아침 메테르니히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았다. 대형 금융회사 대표였던 그의 아버지가 전날 저녁에 사기범으로 체포되었다. 이 엄청난 금융 사기로 수천 명에 이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힘들게 벌어 알뜰히 저축한 돈을 하룻밤 사이에 몽땅 잃고 말았다. 신문에서는 범인과 심지어 그 가족의 사진까지 더하여 이 사기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그제야 우리는 이 불운한 친구가 왜 학교에 오지 않았는지 이해했다. 창피했을 터다. 메테르니히의 자리는 2주 동안 비어 있었고, 그동안 신문들은 그의 아버지가 벌인 사기 행각을 점점 더 상세하게 파헤쳐 보도했다.
그리고 3주째에 접어든 어느 날 아침, 교실 문이 열리고 메테르니히가 조용히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재빨리 책을 폈고, 수업이 진행되는 두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우리는 늘 하듯이 복도로 나갔다. 메테르니히는 곧장 복도 끝으로 가서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홀로 서서, 마치 거리에서 그의 관심을 온통 사로잡는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창밖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가련한 친구가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고, 사실은 몹시 외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만든 이런 고립이 그에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지 알았기에, 우리는 감히 장난도 치지 못했고 크게 떠들며 웃을 수도 없었다. 그는 분명 우리가 다정하게 다가와 주기를 바랐을 터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다가갈 방법을 잘 몰랐던 우리는 서로 눈치만 보며 주저했다. 누구도 먼저 나설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한없이 길었던 몇 분이 지나고 종소리가 다시 우리를 교실로 불렀다. 메테르니히는 빠르게 휙 돌아 우리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서둘러 교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서둘러 책을 펼치는 동안 앙다문 그의 입술은 아까보다 훨씬 더 창백해 보였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 그는 재빨리 교실을 나갔고, 결국 우리 중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죄책감을 느꼈고, 상황을 바로잡을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그의 자리는 다시 비었다. 우리는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고, 그가 어제 학교에서 돌아와 갑자기 어머니에게 학교에 더는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빈을 떠나 작은 도시의 어느 약국에서 직업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그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가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면 그는 분명 우리 모두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돕지 못한 우리의 주저가 그의 인생 경로 변경에 의심의 여지 없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날 아침 우리의 말 한마디, 다정한 몸짓 하나가 그에게 불행과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어쩌면 줄 수 있었으리라.
그 중요한 순간에 그를 저버리고 만 것은 공감 부족이나 무관심, 못된 의도가 아니었다. 가장 필요할 때 올바른 말을 못 하게 막는 것은 많은 경우 용기 부족인 것 같다.
패배나 굴욕의 수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잘 알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우리의 말 한마디, 다정한 몸짓 하나가 그에게 불행과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어쩌면 줄 수 있었으리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회고되어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일화는 학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공감을 표현했어야 할 중요한 순간을 놓쳤고, 그래서 친구의 인생에 평생 남을 결과를 남겼던 일화를 회상합니다. 당시의 머뭇거림, “가장 필요할 때 올바른 말을 못 하게 막는 것은 많은 경우 용기 부족”임을 깨닫는 경험을 통해, 그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후에 알려진 츠바이크의 편지와 기록이 생생하게 보여주듯이, 이런 깨달음은 이후 그의 행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이런 옛 경험을 마음에 새겼고, 소수의 동시대인과 동료 작가들과 함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힘을 쏟았으며 출판 수익금의 상당 부분을 기부했습니다.